용산 전쟁기념관 관람 후기 마지막 포스팅입니다. 워낙에 전시물이 많다 보니까 세번으로 나눠서 올립니다. 이번에는 용산전쟁기념관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6.25 전쟁실입니다. 전시관 건물 2층에 있습니다.

 

 

용산 전쟁기념관 관람 후기 1 - 야외 대형장비 전시장

전쟁기념관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29에 위치한 전쟁 박물관입니다. 이곳은 정말 퀄리티가 높은 박물관인데 홍보가 좀 적은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전쟁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대한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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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전쟁기념관 관람 후기 2 - 전시관 선사시대 ~ 조선 근대

용산 전쟁기념관 관람 후기 2탄입니다. 바깥에서 전차, 항공기 등 대형 전시물이 있는 야외 전시장을 둘러봤다면 이제 전시관으로 입장합니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넓은 홀이 있습니다. 전시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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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시작과 낙동강 방어 전투, 인천상륙작전 등 제목만 들어도 생각이 나는 전쟁 초기의 주요한 사건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관람방향이 시간순으로 되있어서 역사 공부에도 도움이 됩니다. 여기서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과외 선생님들을 본 것 같네요. 학교공부로 따지면 박물관은 교보재를 통한 역사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니까요.

 

전쟁기념관 625 전쟁실 1

 

 

누가 먼저 침략을 시작했는가에 대한 논란은 일부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아직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전쟁기념관은 국방부 산하기관이 관리하기 때문에 북한의 남한 침략이 국방부의 기본 입장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전쟁기념관 북한의 남한침략

 

당시 군사력을 보면 남한은 전차가 한대도 없고 항공기도 북한의 10분의1밖에 되지 않으므로 남한이 북한을 침공하는 건 계란으로 바위깨기이기 때문에 정황상 북침이 맞다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625 전쟁 남북한 군사력

이렇게 된 이유는 주한미군이 철수할 때 의도적으로 장비를 남겨두지 않아서라고 하는데요. 사실 미국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보다 이승만이 먼저 전쟁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다고 합니다. 이승만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은 하버드 대학을 나오고 미국인 여성과 결혼한 친미주의자이자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남과 북이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로 갈라지자 이승만은 통일 전쟁에 대한 바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근대사를 배웠다면 들어봤을 겁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시대니까 전쟁이 만연한 때 할 수 있는 발상이긴 한데 문제는 군대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북진통일을 주장하면서 이미 오랜기간 전쟁이 마무리되가는 미국의 주의를 끌게 되어 오히려 미국이 무기를 다 들고 돌아가버리는 결과로 이어진 부분도 있는데요. (국군에게 무기를 남기고 가면 그걸로 북한과 전쟁을 시작할까봐) 그러다 보니 소련과 북한이 먼저 선수를 쳐버리고 미국도 책임 의식을 느껴서 바로 돌아와 참전을 합니다.

 

이때 부랴부랴 첫번째로 투입된 미군은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스미스 부대입니다. 6.25 발발 후 10일만에 지금의 경기도 오산시에서 북한군과 교전하는데 결과는 개박살이 납니다. 540명의 스미스 부대에서 3분의 1인 180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수합니다. 당시 태평양 전쟁을 승리한 최강의 미군이지만 투입된 부대는 정예병이 아닌 신참들이 많았는데 그들에게 강력한 T-34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북한군과 맞서라고 할만큼 상황파악도 준비도 안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지시한 미국 태평양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 조차 스미스 부대의 투입은 죽음의 임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625 전쟁 스미스부대
625전쟁 스미스 부대 문서

박물관 후기에 역사 설명이 좀 길어졌는데 암튼 당시 남한과 미국이 북한군의 공격에 정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피해가 막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6.25 전쟁의 보병이 사용한 M1 카빈 소총입니다. 소총은 영어로 Assault Rifle 이라고 하는데 보병들의 주력 화기입니다. 돌격소총이라는 말처럼 보병들이 돌격하며 쏠 목적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주력화기로 사용합니다.

 

아래는 구러시아 제국이 개발한 모신나강 소총입니다. 소련의 스나이퍼(저격병) 영화를 보면 이 총이 많이 나오지요. 당시 시대를 감안하면 먼거리에서도 정확도가 높은 저격이 가능한 총입니다.

 

M1 카빈 소총, 모신나강 소총

 

다양한 개인화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6.25 전쟁은 전쟁에 쓰이는 화기가 엄청나게 강력해진 2차대전 직후에 일어나서 이 총들의 살상력은 무시무시합니다. 

 

개인화기 625전쟁

 

이런 구식 기관총으로도 한명의 사수가 짧은 시간에 수십명의 적을 살상하는게 가능해졌기 때문에 전술이 매우 중요합니다.

 

기관총

 

육탄 10용사의 동상입니다. 이거 군대 시절에 정신교육 시간에 들어본 것 같은데 국군이 북한군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할 수단이 없으니까 10명의 특공대가 81mm 박격포 포탄을 들고 자폭 공격으로 진지를 탈환한 전투입니다. 동상에 보면 박격포 포탄을 손에 들고 돌진하는 용사들이 리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전장의 군인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줄 각오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지만 인도적으로 보면 참 안타깝지요. 자유의 댓가는 육탄 10용사와 같은 호국 영령의 목숨이었습니다.

 

세계 역사적으로 보면 자살 특공대라는게 여러개 있습니다. 태평양전쟁을 시작한 일본의 카미카제 특공대, 알카에다의 자폭 테러 등 주로 안좋은 쪽으로 알려졌는데요. 막상 우리 입장에서 보면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입니다. 그런 각오와 정신이 없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보통 사람에게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전쟁중이라도 81mm 포탄을 들고 기관총 진지에 돌격하라니 말이 안되지요.

 

전쟁기념관 육탄 10용사

 

송악산 전투에 대해서 설명이 잘 나와 있습니다.

 

전쟁기념관 육탄 10용사

 

컴뱃나이프를 장착한 M1이네요. 6.25전쟁 영화에는 꼭 총검술로 싸우는 백병전이 나오지요. 군대 시절을 경험을 떠올리면 육군의 M-7 나이프는 개인에게 지급하긴 하는데 여러가지 이유로 날이 안서있습니다. 현대전에 총검의 효용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육군은 총검술을 2019년에 신병교육대 훈련에서 폐지시킵니다. 그렇다고 근접전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겁니다. 특수부대원들은 나이프만 가지고 싸우는 기술도 연마하니까요. 저렇게 총검을 장착하고 싸우는 일은 점점 사라진다는 뜻 입니다.

 

전쟁기념관 소총

 

저런 작은 항공기에서 손으로 포탄을 투하하는 모을 보면 6.25때 국군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전쟁기념관 폭격

 

전쟁으로 피난을 가는 국민들의 모형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요.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전쟁을 할 수 있는 장정을 제외하고 많은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피난을 갔는데요. 폴란드에는 무려 400만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넘어 갔다고 합니다. 엄청난 숫자네요. 어서 빨리 전쟁이 끝나야 고향으로 돌아갈텐데 큰일입니다.

 

전쟁기념관 피난민

 

국군이 가진 무기중에 유일하게 지상에서 북한의 T-34전차에 맞설 수 있는 105mm 곡사포입니다. 박격포로는 전차의 장갑을 쉽게 뚫을 수 없습니다. 

 

전쟁기념관 곡사포

 

한강 방어선을 사수하는 4D(?) 모형입니다. 앞에 스크린에서는 영상이 재생되어 더 실감이 납니다.

 

전쟁기념관 4D 영상

 

퀄리티가 상당히 높네요.

 

전쟁기념관 4D 영상

 

전쟁 공훈을 세운 한신 대장의 흉상입니다.

 

전쟁기념관 한신 대장

 

낙동강이 넘어갔다면 아마 전쟁은 북한의 승리로 끝났을 겁니다. 

 

전쟁기념관 낙동강

 

학도병의 리얼한 모델이 낙동강 전투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이 처절한 싸움을 하여 북한군이 부산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전쟁기념관 낙동강 사수

 

이것도 4D 전시물입니다. 뭔가 비장한 느낌이 드네요.

 

전쟁기념관 4D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 뺏긴지 3개월만에 1950년 9월28일 다시 수복하고 태극기를 계양합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9월 15일에 성공하여 국군은 인천을 수복하고 바로 서울로 진격하여 북한군을 서울에서 몰아냅니다.

 

전쟁기념관 서울 수복

 

공산 치하 3개월 간 북한군의 폭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민재판으로 죽거나 강제 징용, 납북됩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필자의 친할머니의 아버지(진외증조부)도 서울이 함락되었을 때 납북되신 걸로 들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친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까지도 이산가족 상봉은 커녕 생사확인도 안되었습니다. 아마 북한에서 여생을 마치셨겠지요.

 

전쟁기념관 북한군 폭정

 

국군 정훈대대에서 사용한 녹음기와 악기라고 합니다. 이때도 있을 건 다 있었네요.

 

전쟁기념관 녹음기 악기

 

전쟁은 초기에 남한과 북한의 통일전쟁이었지만 유엔군과 조중연합군이 참전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 성격으로 확대됩니다.

 

전쟁기념관 625 지도자들

 

남한과 유엔군 측은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 장군, 트루먼 대통령 등 다양한 전쟁 지도자들이 이끌었습니다.

 

전쟁기념관 625 지도자들

 

전쟁기념관의 모형들은 다 리얼하네요. 전쟁의 지도자들의 심각한 표정이 정말 압권입니다.  왼쪽부터 맥아더 미국 태평양사령관(UN군 최고사령관),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 무초 주한미국대사입니다. 

 

전쟁기념관 625 지도자들

 

다른 각도에서 보니 더 실감나네요.

 

전쟁기념관 625 지도자들

 

6.25 전쟁실 2입니다. 전쟁실 1이 전쟁 초기~서울수복까지라면 2는 북진과 휴전까지를 다룹니다.

 

전쟁기념관 625 전쟁실2

 

국군을 환영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전쟁기념관 국군

 

이 시대의 군복과 장비도 꽤 멋지네요.

 

전쟁기념관 국군

 

11월에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면서 서부전선의 미8군은 큰 타격을 입습니다. 퇴로가 막힌 유엔군과 피난민들을 철수 시키는 흥남철수작전이 실시됩니다. 문제인 대통령의 부모님도 이때 배를 타고 거제도로 내려왔다고 하지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수 작전 중 하나로 2차 대전의 됭케르크 철수 작전과 비교되기도 합니다. 북한의 민간인을 버리지 않고 같이 철수했다는 점에서 자유 민주주의 진영의 역사에서 큰 의미가 되는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어려운 여건에서 북한 주민이 자발적으로 이남을 선택했고 미군과 국군에게는 큰 부담이었지만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서 결국 성공적인 철수를 합니다.

 

전쟁기념관 흥남철수작전

 

한국전쟁 당시 사용된 물품들 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있는 듯 하네요. 드라마 D.P의 대사처럼 구형 수통이 아직도 육군에 남아있는지는 모르겠네여. 

 

전쟁기념관 국군 장비

 

구형 수통의 포스가 있네요. 필자는 군복무한 연식이 꽤 됐는데 구형 수통을 쓴 적은 거의 없지만 본 적은 많습니다. 미국이 오래전에 만든 알루미늄수통의 품질이 더 높다는 평가가 있는데 틀린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보급품은 신형을 선호하기 때문에 구형을 들고다니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겠지요.

 

전쟁기념관 국군 수통

 

흥남철수 이후 38선에서 대치하는 기간이 길어지고 전쟁 후기에는 고지전이 주된 전투가 됩니다. 백마고지 전투는 6.25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9일간 강원도 철원군에서 벌어진 전투로 남한 측이 중공군을 물리치고 승리합니다. 그런데 이 짧은 기간에 한국군 사상자는 3396명, 중공군 사상자 1만4천여명이라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합니다.

 

전쟁기념관 백마고지

 

곡사포 부대를 재현해놨습니다. 진짜 퀄리티가 좋네요.

 

전쟁기념관 곡사포

 

치열한 전투의 흔적을 재현해놨습니다. 하이바나 총기가 실제 국군의 유품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이바에 나있는 총탄 구멍 사이로 풀이 돋아난 장면은 뭔가 가슴이 짠하고 울리는 것 같습니다.

 

전쟁기념관 전장 모형

 

영화에서 보면 전사자를 묻은 후에 하이바를 올려 놓는데 실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치열한 전쟁 도중에 유해를 고향으로 보낼 수는 없을 테니까 임시적으로 장사를 치뤄주고 유해를 수습한 다음 다시 다음 작전지로 이동했겠지요. 이런 임시적인 무덤은 나중에 그 지역의 안전히 확보되면 국군에서 수습을 했을 겁니다. 군번줄이 달려있는 건 나중에라도 신원을 확인해서 유족들에게 통보하고 국가 유공자로써 기록 관리하기 위해서 입니다. 지금은 국가보훈처가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국립묘지에 국가 유공자가 안장되는 것은 국가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공로에 대한 예우를 하기 위함입니다. 생전에 받지 못한 공로에 대한 보상은 가족과 후손들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실제 국가유공자 후손들은 다양한 혜택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찾아보면 다양한 혜택이 있음)

 

전쟁기념관 전장 모형

 

1953년 7월27일 6.25 전쟁 발발 3년 1개월만에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조인됩니다.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K. 해리슨 2세 중장, 중공군 수석대표로 남일 대장이 협정문에 서명합니다. 정전협정문 18부를 각 군사령관에게 전달하여 유엔군사령관 클라크와 중공군 팽덕회, 북한의 김일성이 각각 서명을 합니다. 이로써 길고 고통스러웠던 6.25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전쟁기념관 정전 협정

 

6.26 역사에 남아있는 빛바랜 흑백사진들과 당시 사용하던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쟁기념관 625 사진

 

5학년2반 국어책이네요. 이건 철수와 영희 버전 보다 훨씬 더 이전 시대의 교과서네요. 국어책의 고조선급.

 

전쟁기념관 국어 교과서

 

국밥 같아 보입니다. (피난민 돼지국밥?) 전쟁이 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요. 

 

전쟁기념관 국밥

 

전쟁이 나도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 한 미래는 있습니다. 저렇게 공부하던 어린 학생들은 이제 80대가 넘으셨겠네요.

 

전쟁기념관 학교 모형 1950년대

 

이건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는 모습 같네요.

전쟁기념관 전쟁 후 재건

 

군인과 민간인이 함께 집을 만들고 있습니다. 군인은 전시에는 전쟁을 하고 평시에는 나라의 일꾼으로 쓰입니다. 민간의 일을 돕는 대민지원 일도 군이 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얼마전에도 중부지방에 폭우가 와서 물난리가 났을 때 군인들이 복구 작업에 투입되었죠.

 

전쟁기념관 전쟁 후 재건

 

6.25 전시실 2를 마치고 전시관을 나와서 보니 탁트인 광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짧은 시간에 6.25 전쟁을 경험한 것 같아서 가슴이 먹먹하네요. 수많은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또 전후 살아남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생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기념관 전시관 정문

 

 

이 전쟁기념관은 아시아 최대 규모라고 합니다. 6.25 전쟁이 20세기에 아시아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쟁이기도 하고 또 전시실 내용이 풍부한 것도 있습니다. 사진을 보면 알지만 유물의 종류와 개수도 다양하고 모형이나 영상, 4D컨텐츠 등 퀄리티가 높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번은 방문해야할 역사적 의미가 깊은 기념관으로 남녀노소 추천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말이 별로 필요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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