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광장 개장
8월 6일 광화문 광장이 서울의 광장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광화문에 다녀왔습니다.
기존에 있던 도로를 메우고 도보를 넓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는 장소으로 만들었다는데 과연 어떨까 하고 가봤습니다.
광화문 광장은 5호선 광화문역에서 바로 이어집니다. 5호선에서 표지판을 따라 나오면 될겁니다. 이날 필자는 명동쪽에서 따릉이를 타고 이동했는데 광장안에 자전거를 타는게 금지된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들도 많고 다들 걷는 분위기라서 근처에 따릉이를 주차시키고 도보로 이동했습니다.
남쪽에서 광화문 광장을 들어가면 충무공 이순신의 늠름한 동상이 우뚝 솓아 있습니다. 여기서 부터 북쪽의 세종대왕 동상까지가 광장이니까 이 광장은 길이가 깁니다.
이날 온도가 30도가 넘는 더위였는데 충무공의 동상 앞에 분수를 틀어줘서 아이들이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순신 동상의 서쪽의 세종문화회관 앞은 차가 다니는 도로였습니다. 여기를 도보로 메꿔서 사람들이 광장에서 바로 갈수 있도록 만든 것이지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걸어서 갈 수 있는 동선이 나와서 이 지역 매장들의 매출도 살아났다고 합니다.
네이버 거리뷰에서 보면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차도가 보입니다.
이순신 동상은 가까이 가서 보면 우러러 보도록 되어있습니다. 북쪽의 세종대왕과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최근에 한산 영화를 봐서 그런지 국뽕이 좀더 차오르는 분위기입니다. 아래쪽엔 사람들이 모여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바닥에 분수를 계속 쏴주기 때문에 덥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또 오후에 가면 세종문화회관 건물의 그늘로 뙤약볓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한번 더 보고 북쪽으로 가보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명언들이 여러개 세겨져 있습니다. 노량해전은 조명 연합 수군이 왜군 200척을 침몰시켜서 사실상 임진왜란을 종결시킨 해전으로 안타깝게도 이순신 장군은 전투중에 전사합니다. 그의 어록을 보면 '이 원수들을 무찔러 없앨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하늘에 기원했습니다. 그의 기원을 하늘이 듣고 이루어 준 까닭일까 운명처럼 전사하셨지요. 이게 광화문 광장 새로 공사하기 전에도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비석의 상태가 깨끗한 걸로 봐서는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QR로 찍으면 광화문광장 홈페이지로 연결된다)
뒤에 보면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헌납했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때문에 일부 정치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라 지금은 큰 이슈는 안되는 듯 합니다. 이 동상을 세운 이유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광화문 주변에 남아있는 일제의 흔적을 청산하는 사업의 하나였습니다. 일본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려고 했는데 그게 이순신 장군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보면 정확한 선택이라 볼 수 있겠지요.
이 작품은 80년대 작고하신 조각가 김세중이 제작하셨습니다.
이순신 동상을 뒤로하면 북쪽으로 세종대왕 동상이 있습니다. 그 뒤에는 광화문이 있고 광화문 뒤에 경복궁, 그 뒤에 청와대가 있으니 이 자리는 한민족의 역사적인 자리입니다. (청와대의 뒷산은 북악산으로 청와대와 함께 개방되었다)
스타벅스 앞에서 아이들이 시원한 물놀이를 즐기고 있습니다. 한 다섯살? 에서 초등학교의 아이들이 온몸을 흠뻑 적시며 놀았습니다. 여기가 원래 도로였던 곳으로 역시 스타벅스는 대박 명당자리에 있네요. 마르고 닮도록 커피가 팔릴 듯.
광화문 역에서 연결되는 통로입니다.
쭉 올라가서 세종대왕 동상까지 갑니다.
한글 창제와 각종 과학과 문화 분야에 업적을 남긴 갓종대왕입니다. 한글을 창제했으므로 어떻게 보면 모든 한국인들은 세종대왕에게 받은 기술을 매일 쓰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한글이 언어학적으로 가장 우수한 언어는 아니지만 해외의 학계에서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과학적인 언어 중에 하나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언어는 자연발생적인 경향이 있어서 이렇게 한 나라의 왕이 언어를 개발 한다는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당시 중국의 한자를 사용해서 백성들이 겪는 소통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함입니다.
'세종어제 훈민정음,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생각하며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빛물을 측정하는 측우기입니다.
해시계인데 어떻게 보는 건지는 모르겠네요. 해가 남동쪽에서 시작하여 서북쪽으로 넘어가니까 북쪽에서 시계방향으로 도는 건가.
세종 시대에 한국의 하늘에 맞게 개량한 혼천의입니다. 혼천의는 천동설에 따른 천체의 모형입니다. 사실 이 모형은 1만원권 지폐의 뒷면 도안입니다. (필자도 찾아보고 지금 알았다)
동상 왼쪽에는 한글 문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여기서 사진을 많이 찍더군요. 한 나라에서 전체 문자를 다 창조한 왕은 전세계 역사적으로 세종이 유일한게 아닌가? 오늘날 서구권에서 가장 많이 쓰는 알파벳은 그리스 문자가 기원이며 그리스 문자는 자연발생한 문자입니다. 훈민정음은 자연발생하지 않았지요. 나무위키의 해설 중에는 한글도 자음과 모음으로 나타내는 알파벳 시스템이라고 하는데 세종대왕 시대에 그런 사실을 아셨을지는 모르겠고 세종대왕 본인이 그냥 우리나라 말을 분석해서 문자 체계를 만드신 것이니까 엄청난 업적입니다. 정확히 훈민정음을 누가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집현전 학자들과 세종대왕의 공동 창제설이 보편적입니다. (세종대왕 혼자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광화문 광장의 주요 지점을 둘러본 것 같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세종대왕 동상의 뒷편으로 가면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의 전시관인 세종이야기가 있습니다. 날씨도 더운데 안쪽으로 ㄱㄱ 합니다.
지하로 내려가면 전시관과 주변 건물들로 연결됩니다.
세종이야기
전시관이지만 퀄리티는 박물관에 가깝습니다.
송강 정철의 속미인곡은 순 우리말을 많이 사용하여 높은 평가를 받은 장편가사입니다. 10년에 한번 수능에 나올법한 고전 문학인데 훈민정음을 사용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시가가 나올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늘날 아름다운 한글 문학의 조상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중세시대 한글과 한자 시가의 차이점은 분명하지요. 한자어와 한글의 리듬감(운율)은 많이 다릅니다. 대중 가요나 힙합같은 걸로 비교해봐도 좋은데 K-POP은 그 언어 특유의 느낌이 있습니다. 물론 속미인곡을 보고 K-POP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지만 수백년전에 그렇게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세종대왕이 없어서 훈민정음이 없었고 지금까지 우리가 한자어나 영어 알파벳을 사용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베트남어는 변형된 알파벳 문자를 사용합니다. 국뽕도 있지만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문자가 없고 한국에는 있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문자란게 이제와서 갑자기 만들 수는 없는거니까요.
중세시대의 다연장로켓인 신기전입니다. 지금은 로켓을 발사하지만 과거에는 다수의 화살을 발사하는 무기였네요.
조선시대 악기인 편종입니다. 중국에서 들여왔으나 잘 맞지 않아서 세종 11년에 독자적인 편종을 만들었습니다.
세종의 태그 클라우드,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지키는 성웅의 상징이라면 세종대왕은 민초들을 위한 성군의 상징입니다. 사람은 가축과 달리 먹고 사는 것 이상으로 문화에 대한 욕구가 있는데 그것을 백성들에게 내려준 것 입니다. 즉 백성들의 빛입니다. 조선시대의 사회와 삶을 지금 시대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좀 무리이고, 한글을 잘 쓰고 있는 우리 후손들이라면 존경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지요. 단순히 국뽕에 의한 강요가 아니라 훈민정음에 대한 감사가 스스로 우러나올 정도가 되면 좋을 겁니다.
충무공이야기
영화 한산의 개봉으로 요즘 핫한 이순신 장군에 관한 전시는 충무공이야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순신의 전쟁에 대해서 다루다 보니 세종이야기 쪽 보다 이쪽이 볼거리는 더 많은 것 같은데요.
거북선 모형입니다.
거북선 내부에는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모형들이 있습니다. 노를 젖는 병사를 격군이라고 합니다.
화포를 장전해서 발사하는 화포장입니다. 조선은 중세시대이기 때문에 화포를 사용한 해전이 중요한 전술이었지요. 명량 등 임진왜란이 배경인 영화에서 보면 화포의 사거리안에 들어왔을 때 최대한 피해를 주고 그 다음에 배에 갈고리를 걸어 화살공격과 백병전으로 적을 섬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흥미롭게 화장실도 재현해놨습니다. 거북선이라도 화장실은 가야하니까요.
영화 한산의 김한민 감독의 인터뷰에서 보면 거북선의 내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많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일부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현했다고 말했습니다. 거북선은 당시의 주력 군함인 판옥선을 기반으로 하는데 노젖는 구역, 화포와 화살을 발사하는 구역, 지휘통제 구역 등으로 나눠져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모형의 내부는 해군 사관 학교의 거북선 모형을 기준으로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한 기록이 없다는 말을 한 것 같음)
개인적인 추측인데 거북선은 무기가 뛰어나게 설계한 군함이라기 보다는 이순신 장군의 특공대가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이 있습니다. 당시 일반적인 군함은 함장(배의 지휘관)이 위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다른 배들과 빠르게 교신을 주고 받으며 학익진과 같은 전투 대열로 빠르게 전환하며 싸우기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거북선은 잠수함처럼 완전히 감싸서 지휘소에서 시야 확보가 쉽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위로 올라가야 멀리 보고 빠르게 상황 파악을 할 수 있는데 거북이 등껍질 처럼 위를 장갑으로 막아놨다는 것은 상황 파악할 필요없이 전의 진법을 깨뜨릴 목적으로 돌격하기 위한 형태로 보입니다.
영화 한산에서 보면 거북선은 적의 화포 공격이나 충돌에도 굴하지 않고 돌격하여 왜군의 오와열을 망가뜨리고 사기를 떨어뜨려 이순신의 본대가 왜군 주력함들을 쓸어버릴 수 있게 합니다. 영화에서도 거북선의 개발자이자 군관인 나대용이 거북선을 타고 출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투 진형 퍼즐 체험은 모형들도 진을 만들어 보는 퍼즐입니다. 이순신 해군이 많이 사용한 장사진과 학익진을 체험해 볼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종이에다가 진의 모양을 그림과 글로 표시하셨겠지요. 우리도 한번 따라해보는 겁니다.
조총으로 왜군 군함을 잡는 게임도 있네요 ㅋ
기록에 따르면 거북선은 임진왜란 이전에도 있었다고 합니다. 군관 나대용이 1년에 걸쳐 왜군과 싸울 거북선을 완성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 사이에 이순신 장군과 많은 교류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확실히 왜군은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검술을 사용한 백병전에 능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수백년동안 거쳐온 일본 사무라이 시대의 절정기입니다. 왜군은 섬안에서 자기들끼리 칼싸움만 수백년한 종족입니다. 왜군들이 갑판에 오르면 조선군이 밀릴 수 있기 때문에 거북선의 등판에는 판자로 덮고 쇠못을 박아 놨던 겁니다. 이게 바다위라고 생각하면 왜군이 거북선에 올라타도 배가 흔들리는 가운데 발을 헛디뎌서 못에 찔리기가 쉽습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왜군들도 거북선에게 함부로 덤비지 못했던 겁니다.
또 돌격선이기 때문에 노의 위치가 선체 안쪽에 있습니다. 이는 선체를 부딪혀도 노는 멀쩡하기 때문에 빠른 대응이 가능합니다. 화포의 위치만 봐도 전후좌후로 배치한 것도 이해가 갑니다. 당시 포격전의 정석은 배의 좌우에 포문을 여러개 배치하여 사거리에 들어온 적군함에 포격하는 방식입니다. 앞쪽에 포문은 돌격하면서 근거리 적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왜군을 잡으려고 특수 제작한 군함이다 보니 왜군들이 무서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시관에서는 당대 세계 최고의 돌격선이라는 극찬을 합니다. 영화 한산에서 거북선이 돌격하는 카타르시스를 잘 표현했으니 강력 추천합니다.
판옥선은 조선의 주력함이었습니다. 확실히 군함의 능력은 왜군보다 뛰어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임진왜란 초기에 전쟁 준비가 부족하여 단단히 준비하고 들어온 왜군들에게 육지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으나 결과적으로 이순신 장군의 해전 승리가 육지의 왜군들의 보급을 끓어 버려서 점차적으로 약해진 왜군은 일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판옥선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있습니다. 확실히 돌격선인 거북선과의 차이가 느껴집니다. 판옥선은 돛과 노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갤리에 가까운 전투함입니다.
충무공 시호의 유래에 대해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표준 영정입니다.
이순신 장검은 길이가 197cm로 매우 긴데 실제 전투에서 사용하는 용도가 아니라 장검을 보며 마음을 수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진품은 현충사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장검에 새겨진 명문은 충무공의 비장한 각오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한산 대첩에 대한 내용입니다. 한산 대첩에는 왜군 47척을 침몰시키고 12척을 나포했으며 조선은 남해의 해상을 장악하여 왜군의 사기는 심각하게 떨어집니다. 놀라운 것은 왜군 전투함을 거의 다 박살낼 동안 이순신의 함대 55척은 단 한개도 손실이 없었다는 것 입니다. 조선군 피해는 전사자 3명에 10명 부상했으나 충무공이야기 전시관에서 제시하는 일본군 사상자는 약 9천여명에 육박합니다. 아마 일본군함 59척 x 승선인원을 150명 정도 잡아서 낸 수치같기도 합니다. 적장 와키자카 야스히루는 남은 함선 14척과 400명을 데리고 도주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명량 해전, 노량 해전 등 이순신 장군의 주요한 전투에 대해서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봤다면 그 감동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세종이야기 전시관을 뒤로하고 나오니 광화문과 북악산이 보입니다. 국뽕 한사발 마신 듯한 기분도 드는데요.
사실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알고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서 전시관을 가보니 이순신 장군은 정말 말도 안되게 엄청난 성웅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은 모든 것을 자신의 민족과 나라를 위해 다 바치고 정작 본인은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셨습니다. 그렇게 고생했으면 노년에 쉬면서 좋은 날도 있었을 법 한데요. 전장에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세종이야기의 전시관을 들리니 광화문광장이 단순한 광장이 아니라 뜻깊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여름이라 낮에는 조금 덥긴 하지만 여러모로 추천할 수 있는 트레킹/데이트/나들이 장소입니다. 광장을 거닐며 전시관 관람을 마친 다음 광화문역 쪽에서 식사하고 커피 한잔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광화문광장이라고 개장한지는 며칠됐지만 아직 좀 뭐가 없어서 횡한 느낌도 드는데 점차 정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광화문 광장을 트레킹한 후 경복궁이나 청와대를 관람하는 코스도 추천할 수 있습니다.
*광화문광장 공식 홈페이지는 아래 링크입니다
광화문광장
광화문광장
gwanghwamun.seoul.go.kr
'트래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 곶자왈 도립공원 트래킹 후기 / 곶자왈 뜻 / 곶자왈 탐방로 테우리길 오찬이길 (2) | 2022.08.25 |
---|---|
뽀로로앤타요 테마파크 제주 후기 (1) | 2022.08.23 |
용산 전쟁기념관 관람 후기 2 - 전시관 선사시대 ~ 조선 근대 (0) | 2022.08.19 |
서울 역대급 폭우 피해 / 반포한강공원 침수 상황 / 잠수교 침수 상황 / 반포대교 사진 - 2022년 8월 9일 (0) | 2022.08.09 |
남산 팔각정 광장 봉수대 전통무예 시범 (0) | 2022.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