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에 다녀왔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일제시대이던 1932년 4월 김구의 지시로 상하이에서 열린 일본의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성공하신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입니다.
윤봉길 의사하면 도시락 폭탄으로 일본의 고위 장성들을 살해하고 피해를 입힌 것으로 알려져 있죠. 의거를 행한 나이가 불과 24세이고 의거 후 일제에 붙잡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일본군의 총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일제는 사형집행 후 윤봉길 의사를 가나자와시에 비밀리에 매장해서 행방을 알 수 없었습니다. 해방후 1년 뒤 1946년 3월 임시정부 유해발굴단이 윤 의사의 유해를 찾아내서 그해 5월에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다시 한국으로 모셔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효창원(지금의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46년이니까 14년만의 귀환이었고 윤봉길 의사가 하늘에서 대한민국이 독립되었다는 것을 들으셨다면 매우 기뻐하셨을 것 같습니다. 대한독립의 꿈이 그의 사후에 이루어졌으니 국가의 영웅으로 길이 남으시게 된 것 이지요.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는 이런 과정이 잘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필자도 이 기념관을 다녀오고 나서 윤 의사의 강력한 독립운동의 의지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또 당시 민족주의 지도자였던 백범 김구의 고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은 양재시민의 숲과 연결되어 있고 신분당선 양재시민의숲역 5번 출구와 가깝습니다. 양재시민의숲역을 매헌역이라고도 하는데 매헌이 윤봉길 의사의 호입니다.
9월 중순인데 아직 덥더군요.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입니다. 2022년 올해가 상하이의거 90주년네요. 10년 후면 벌써 100주년입니다.
관람시간은 10시~18시입니다. 동절기에는 좀 더 짧아집니다. 매주 월요일 휴관입니다. 관람료는 무료인데 지금까지 가본 윤봉길, 안중근 등 독립운동가들의 기념관들은 거의 다 무료였습니다. 당연히 국가에서 무료로 운영해야 맞는 것 같습니다.
여름의 매헌어록입니다. 윤봉길 의사는 짧은 생에서도 많은 주옥같은 어록들을 남겼습니다. 그의 성품이 얼마나 올곧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기념관의 점자안내판입니다. 시각 장애인에게 신경을 써놓은 부분이 좋네요.
기념관 안내도입니다. 막상 돌아보면 그렇게 크지는 않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기념관의 크기로 비교하는 것은 좋은 기준이 아니지만 예를 들어 지난번에 갔던 남산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보다는 작았던 것 같습니다.
매헌 윤봉길 기념관
윤봉길 의사의 늠름한 동상입니다.
윤 의사는 그 시대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시대 기준으로 보면 일단 인물이 훤칠하고 잘 생겼습니다.
의거 이틀전에 촬영한 이 사진을 토대로 제작한 것 같습니다. '장부출가생불환' - 대장부가 집을 나서는데, 어찌 살아돌아오리오 -과 어록이 써있습니다.
윤봉길 의사 어록에는 나라와 겨레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의 일생입니다. 대체로 독립운동가 중에서는 일찍 세상을 떠난 분이 많았지만 유독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25살에 모든 일을 이루고 일제에 목숨을 잃었는데 그의 어록을 보면 그것조차 이미 예상하셨던 같습니다.
그가 얼마나 순수하고 올곧은 청년이었을까?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만약 스물다섯에 차가운 일본 땅에서 순국하지 않고 14년 뒤인 1946년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다면 그래도 39살 밖에 되지 않는 나이였을 텐데요. 격동의 시대를 풍운아처럼 살다가신 영웅입니다.
기념관에는 윤 의사의 생애와 사후에 받으신 대우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농촌계몽운동 시기 윤봉길 의사의 사상은 순운대편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윤 의사는 확실히 새로운 시대(조선왕조가 끝나고)의 사람이었습니다. 국민들의 무지함이 나라를 잃게 한 적이다는 아이디어는 조선에는 없던 방식입니다. 조선은 임금이 잘 다스리고 신하가 충성하고 백성은 나라님을 잘 따러야 한다는 유교사상의 국가였죠. 백성(농민)이 무지해도 나라가 유지되는 시대였습니다. 한편 농촌계몽운동이라는 건 대부분 국민이 농업에 종사하기 때문이었지 지금말로는 국민계몽운동 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는 일반 농민, 서민들도 알아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뜻으로 시대를 앞서간 윤 의사의 사상을 볼 수 있습니다.
도시락 폭탄 투척 사건으로 알려졌지만 윤 의사는 책을 읽는 문인이셨습니다.
윤 의사는 20세에 이미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합니다. 요즘 시대 같으면 대학생 나이로 책을 저술하기 보다 읽고 있을 나인데요. 대부분 사람들이 까막눈이던 시대에 태어나 20세에 농민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를 쓰셨으니 뭐... 지금 기준으로도 천재는 천재네요.
1930년대 일제의 만주 침략을 시작으로 중국 대륙에 진출합니다. 이 때 동북아 정세가 크게 바뀌는 가운데 윤봉길 의사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윤 의사의 발자취를 연도별로 기록해놨습니다.
기록 내용을 보면 윤 의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갑니다. 이 때 김구와 친분을 쌓는데 시간적으로 보면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이 상하이에서 함께한 기간은 1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윤 의사가 상하이에 도착한 1931년은 김구 단장의 한인애국단이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실행하는 조직이었습니다. 일제의 입장에서 보면 테러리스트라 보겠지요. (지금도 일본 역사의 입장은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를 제국에 도전한 테러범 정도로 취급하는 듯 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보면 일제는 1905년 불법적이고 강제적인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주권을 침탈한 적국일 뿐입니다. 일제는 군대가 강했지만 명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었습니다.
32세의 이봉창은 윤봉길 의거에 앞선 1932년 1월에 천황 히로히토를 저격하려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했습니다. 이봉창 의거는 윤봉길 의거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만약에 일왕 저격이 성공했다면 역사가 크게 달라졌을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봉창 의사도 광복 후 윤봉길 의사와 함께 효창원에 유해를 안장했습니다. 이봉창 의거는 비록 목적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 일은 윤봉길 의사에게도 큰 영감이 됩니다.
윤 의사는 4월29일 천장절에 일본의 수뇌들(장군, 지도부)을 일망 타진하려는 계획을 김구에게 제안하고 이 일의 결행을 위임받습니다.
윤 의사의 마지막 며칠간의 기록입니다. 26일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을 합니다. 여기 선서하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의거를 수행한다는 결심을 굳히시는 모습이 상상됩니다.
27일은 의거 이틀전입니다. 태극기 앞 윤봉길 의사의 사진은 이미 마음에 결심을 하신 윤의사의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입니다. 문인답게 시 4편을 그 자리에 써서 전달했다고 하는데요. 그가 김구 선생에게 마지막으로 전달한 시 4편도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첫번째는 역시 백범 선생에게 - 김구 선생을 생각하며 쓴 시입니다. 이 시에서 윤 의사가 얼마나 김구를 존경했는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말 옛 문인들은 대단한게 시만 가지고도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오늘날 까지 전달하고 있습니다. 뭐 한자로 만들었다는게 좀 그렇긴 하지만 상하이였으니까요;;; 한자는 익숙했을 것 같습니다.
시에서 온 세상이 모두 흐리지만 선생만은 홀로 맑아 있다고 하는데 그 만큼 김구에게 영감을 받았다는 것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김구 선생에게도 불과 1년 남짓 한인애국단에서의 인연이었지만 잊지 못할 젊은이였을 겁니다.
홍커우 공원의 답청은 조금 어려운 시네요. 답청은 봄의 경치를 즐기는 풍속, 봄풀을 밟는 일을 의미합니다. 의거가 일어난 장소에 대한 은유적 표현 같습니다.
청년 제군에게는 라임이 살아있는 시입니다. (래퍼의 재능까지?) 왜놈이 왜 와서 왜 걸대나 - 입에 착 감기는 운율로 청년들의 참전을 독려하는 시입니다.
마지막은 두 아들 모순과 담에게 남긴 시입니다. 유언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조선의 용감한 투사가 되길 바라며 맹가, 나폴레온, 에디슨같은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는 내용입니다.
윤 의사는 사진으로 일본 수뇌부의 얼굴을 익히고 홍커우 공원의 사전답사 후 폭탄 사용 방법을 익혔습니다.
4월 29일 의거일입니다. 김구와 마지막 식사를 한 후 윤봉길은 김구와 시계를 바꿉니다. 이 날은 천하의 김구도 울컥했는지 목이 메어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훗날 지하에서 만납시다' 일제 초기 안중근 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김구 선생과 연이 있지만 윤봉길은 각별한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기념관에 있는 것들은 모조품인데 윤의사의 시계(김구가 쓰다가 의거일에 윤의사와 바꾼 시계)는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4월 29일 의거 당일 김구와 헤어진 윤 의사는 군중 3만명이 모인 홍커우공원으로 가서 관병식이 끝날 때 까지 기다립니다. 이 때 수통형 폭탄을 단상으로 투척하여 일제의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를 처단합니다. 시게미쓰 주중공사와 우에다 중장은 왼쪽발이 절단됩니다. 해군 사령관 노무라 중장이 오른쪽 눈을 실명하는 등 일본 수뇌부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습니다.
참고로 시게미쓰 주중공사는 이때 입은 부상으로 의족을 다는데 후에 일본 제국의 대표로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장군 앞에서 1945년 9월2일 연합군에 대한 항복문서에 서명하게 됩니다.(이때는 외무대신) 당시 미국 뉴스에서는 한국인에 의해 발이 절단되어 의족을 달았다고 나옵니다. 그 한국인이 바로 윤봉길 의사였습니다.
폭탄의 복제품입니다. 도시락 폭탄을 투척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폭탄 2개를 들고 갔는데 수통형 폭탄을 단상에 던지고 도시락형은 예비용이었습니다. 일제 언론에서 벤또 형태의 도시락이 남아있어서 그걸 보도한 것이 지금까지 도시락 폭탄 의거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시락 폭탄은 예비용이나 자결용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도시락 형태의 폭탄은 터지지 않았습니다. 윤 의사가 수통형 폭탄이 제대로 폭발한 것을 확인하시고 사용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우리는 추측할 뿐입니다.
참고로 이 폭탄은 중국인 폭탄제조 기술자 왕버시우가 설계했다고 합니다. 요새는 반중 감정도 있는데 일제 시대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이 손을 잡고 아주 친밀한 사이가 됩니다. 중국 입장에서 봤을 때는 만주를 침략한 일본 수뇌부와 장성들에 대한 공격이니까 대단히 중요한 성공입니다. 실제로 윤봉길 의거의 성공에 감명을 받은 장제스(후에 중화민국 - 타이완의 총통이 되는 인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여 광복 후 카이로 -포츠담선언에서 한국이 독립되는데 영향을 끼칩니다.
당시 상황을 재현한 그림입니다. 17-19m 지점에서 수통형 폭탄을 날려 정확하게 폭발 시키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렇게 군인의 감시가 삼엄한 곳에서 한번에 폭탄투척을 성공시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윤 의사는 타고난 글재주 뿐 아니라 무예에도 상당한 소질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앞의 기병을 넘어서 정확하게 15m 위치에 던지고 또 거기서 바로 폭탄이 폭발해야 의거가 성공할 수 있습니다. 키가 높은 기병에게 걸릴 수도 있고 단상 바깥에 떨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주변의 병사들은 피해를 입겠지만 수뇌부는 무사할 겁니다.
상하이의거는 전 세계에 이슈가 되고
윤 의사는 1932년 조선은 당장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는 국가성쇠를 순환하여 앞당기는 역할이라 역설합니다. 그의 신문조서를 보면 냉철하게 조선의 상황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깊은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윤 의사는 의거 한달 후인 5월 25일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19일 총살형으로 산화하십니다.
윤 의사의 순죽 직전과 직후의 사진은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만 포스팅에 올리고 싶지는 않네요. 궁금한 분들은 기념관에 가서 경건한 마음으로 관람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형이 집행된 곳은 가나자와시인데 일본군들이 윤 의사의 유해를 봉분도 없이 비밀리에 매장했습니다. 즉 윤 의사의 시신을 암매장한 만행을 저지른 겁니다. 광복 후 김구는 윤 의사의 유해 봉환을 위해 임시정부 차원에서 유해를 발굴하도록 합니다. 다행히 1946년 3월6일 유해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7월6일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효창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됩니다.
여기까지 스토리에서 보면 김구와 윤봉길 이 두 사람은 나이차이도 많았고 (1932년 당시 김구 56세 윤봉길 25세) 한인애국단 시절 짧은 시간에 운명처럼 함께한 사이입니다. 김구 선생 입장에서는 조국을 위해 저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보내야 한다는게 평생 마음에 짐으로 남아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광복 후 제일 먼저 한 일 중에 하나가 윤봉길 의사 등 삼의사의 유해를 대한민국으로 모셔온 것은 당연한 일이면서도 매우 인간적인 도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상하이 의거는 시기적으로 광복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전쟁 말기에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한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는 한국을 자유 독립국으로 할 것을 제안합니다.
장제스가 루즈벨트의 왼쪽에 앉아있는 사진입니다.
카이로 선언문은 전쟁이 끝나기 2년 전에 미리 공포되었습니다. 1945년 독일의 베를린에서 열린 포츠담 선언에서 한국 독립이 재확인 됩니다. 포츠담 선언은 일본에 대한 최후 통첩이었는데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카이로 선언이 실행되는 조건이었습니다. 7월26일의 포츠담 선언에도 항복하지 않은 일본은 8월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두번 투하 당한 후 8월15일 천왕의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합니다.
윤봉길 의사의 초상화입니다.
벽에는 윤봉길 의사가 사람들을 가르치는 그림이 있습니다. 농민계몽운동 때의 모습 같네요.
매헌 기념관을 나가니 하늘이 더 푸르게 보입니다.
양재시민의숲은 운동하기도 좋은 곳이지만 매헌기념관에 들려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주신 윤봉길 의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습니다. 필자도 막연히 알고 있었던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조금 더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윤 의사가 서거하셨을 때 나이가 25세인데 요즘 시대로 보면 한참 어린 청년이었습니다. 그의 순수한 나라 사랑의 열정과 헌신이 지금과 같은 자유 대한민국을 만드는 초석이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우리가 당연히 해야할 것은 그분들이 행한 것들을 잘 기억하고 또 하신 말씀들을 잘 세겨들어서 대한민국의 주권을 다시는 누구도 빼앗지 못하게 잘 지키는 일입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의 정신이 10년이 지나도 100년이 지나도 그대로 우리의 가슴속에 남아있기를 바래봅니다.
*매헌의 뜻: 윤봉길 의사의 호인 매헌(梅軒)은 한 겨울에 꽃을 피는 매화의 '매'자와 조선의 충신인 성삼문의 호 매죽헌의 '헌'을 따라 지었다고 합니다. 한 겨울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상황이 떠오르고 충신인 헌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국에 대한 충신이 되겠다는 의지가 새겨진 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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