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는 일본제국의 총리대신(오늘날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것으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최고의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입니다.
한정된 내용을 다룰 수 밖에 없는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사람들이 많다 보니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 후 일제에 체포되서 사형을 당하기 까지의 과정만 부각되는 면도 있었는데요. 그건 독립투사인 안 의사의 최종 종착지였습니다. 그 전까지 국채보상운동의 지부장을 하거나 삼흥학교를 세워 구국인재를 양성하기도 하는 등 일제가 대한민국을 식민지로 지배하지 못하도록 경제, 교육분야의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일제의 강압통치가 심해지자 결국 마지막 수단은 독립군을 일으켜 일제에 무력 대항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안 의사가 일본 재판정에서 '나는 우리나라와 동양의 평화를 위해 적의 우두머리를 죽였을 뿐이다' 라고 말했던 것은 당시 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조선과 일본제국이 대등한 상태의 전쟁을 하고 있다는 그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즉 독립군 장군으로써 적의 지도자를 죽인 것 뿐이다 - 라는 당당한 태도입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는 이런 디테일한 내용들이 각종 사진, 문서의 복사본, 모형 등으로 잘 재현되 있어서 역사 교육을 위해서도 유익합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내용 뿐 아니라 일제 시대 초기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한 지식도 얻을 수 있어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귀한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안 의사는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분이라 좀 더 이야기할 내용이 많지만 역사에서도 많이 배우니까 서론은 이 정도로 하고 후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회현역 남쪽에 위치합니다만, 남산의 일부라고 보는게 맞을 겁니다. 남산타워에서 서쪽 한양도성길로 내려가다 보면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이 나오는데 그 옆에 있습니다.
입구가 아래처럼 긴 보도라서 모르고 지나친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들어가는 길에서 동쪽으로 남산타워가 보입니다.
기념관쪽으로 쭈욱 들어가서 '안중근의사기념관' 글자의 왼쪽으로 돌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의 개요입니다.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쓰다가 일제가 사형을 집행하는 바람에 그 내용이 완성되지 못한 부분에는 분노하게 됩니다. (일본 법정에서 선고 40일만에 처형함)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
한국 독립운동의 영원한 상징 안중근은 처음에는 계몽운동을 펼치다가 1907년 국외로 망명하고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파괴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면서 민족과 인류의 구원 앞에 자신을 산화시켜 간 의사이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문명개화론자인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 아래 어린 시절을 황해도 신천의 청계동 산골 마을에서 학문을 수학하고 무술 연마에 힘을 기울이며 성장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동학군의 공격으로부터 청계동을 지키는데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1897년 프랑스인 빌렘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천주교에 입문하였다. 전도활동을 벌이던 무렵 그는 한국인의 지식 계발을 위해 '대학 설립을 계획하기도 했다.
러일전쟁이 끝날 무렵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과 상의하여, 중국 산둥이나 상하이로 가족을 옮겨놓고 항일투쟁을 전개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국내에서 계몽운동을 펼치기로 계획을 바꿨다. 1906년 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통해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 군대해산 등으로 나라가 위기를 맞자 국외 망명을 단행하였다.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한 그는 각 마을을 돌며 의병 모집을 위해 힘을 쏟아 의병부대를 창설하였다. 그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여 여러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의병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1909년 초 단지동맹을 맺고 의병 재기의 의지를 다져 나갔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찾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1909년 10월 26일, 의거를 결행하니 안중근의사의 하얼빈의거가 그것이다. 안중근의 의거는 이토 히로부미와의 개인적 원한이 아니라 한국 독립, 동양 평화를 위해 거행한 의거였다. 또한 안중근은 해외 망명 이래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끊임없이 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의 철학을 정립할 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동양평화론'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동서양을 떠나 국가와 민족 간의 전쟁과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자는 것으로, 인종주의에 매몰되거나 세계평화사상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안중근은 한국의 의사만이 아닌 동양과 세계의 의사였다.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외롭게 동양평화를 지켜내고자 했던 안중근의사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이자 진정한 평화주의 자였다.
기념관은 지하부터 2층까지 충실합니다. 이 건물이 2010년에 개관해서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기념관이기 때문에 시설이 깨끗하고 관람에 쾌적합니다.
홀에 안 의사의 동상이 있습니다. 뒤에 대한독립 한자는 안 의사가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서 쓴 혈서의 복사본을 확대한 것 입니다.
안의사의 손바닥 도장과 유언입니다. 약지가 짧은 건 손가락을 절단하셔서 그런 거지요.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 묻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을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를 위해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을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성장기에 대해서 그림과 글로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안응칠 역사(안 의사의 자서전)는 옥중 저술되었습니다. 응칠은 조부가 붙여준 아명이자 호입니다 (가슴에 점이 일곱개라는 것에 기인)
심지어 왼손 약지를 끓은 것 까지 재현되어 있습니다. 모형이지만 핏자국까지 표현하는 상당한 디테일입니다. 소름돋네요.
안 의사의 사진엽서가 기증되어 있습니다. 인기가 많아지자 일제놈들이 또 압수하였다지요.
안 의사가 기차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모형입니다. 실물크기에 가까워서 현장의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얼빈의거 시 브라우닝 권총과 총알(복제품)입니다. 실제 총알은 일본 헌정기념관에 있다고 합니다. 뭐 총에 맞은 건 일본인이니까 그걸 달라고 하기도 뭐하겠네요. 그들 입장에서 보면 암살범이 쏜 총알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구국의 영웅이 쏜 총알입니다.
아래 이토 히로부미를 부검한 보고서에 보면 복부에 여러발의 총상이 사망원인인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안 의사는 어릴적 부터 사격의 명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구 선생도 백범일지에 언급했다고 하지요.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린 직후 거사를 치뤘다고 하는데 일제의 거물급 정치인이었던 만큼 상당히 경비가 삼엄한 상황에서 이렇게 정확히 맞춘 것을 보면 명사수가 맞습니다. 이토는 총탄을 맞고 쓰러져 20분만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당시 각국의 신문에서 대서특필되었다. 사진이 흔치 않던 시기라 저렇게 그림으로 표현되었네요. 그림 하나가 명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공을 들인 것이 현대의 관점에서 낯설게 보입니다.
그날의 사진도 일부 남아있습니다. 러시아군 의장대 틈에서 혼자 의거했다니 정말 대단한 용기입니다. 지금 시대에서 봐도 안 의사는 거의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영웅입니다. 세계에는 온갖 폭정을 펼치는 독재자들이 여전히 많지만 이렇게 자신의 몸을 바쳐 제거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독재자 한 사람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고통을 받아도 그 시스템이 오랜 기간 유지되는 건 안 의사 같은 사람이 흔치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일제 재판장까지 재현되어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니 또 분노가 치미네요. 조선을 힘과 교활한 계략으로 뺏은 자들이 마음대로 안 의사를 재판합니다. 대한민국 입장에서 보면 재판을 받아야할 사람들은 일본 제국과 그 부역자들이지만 그들은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 까지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합니다.
일제의 법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15가지 들었는데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소개된 일부 내용을 보면 이토는 조선 국가와 인민들에게 악랄한 범죄를 많이 저질렀습니다. 그 중에는 을사조약 체결, 명성황후 시해, 정미 7조약,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의 의병 대토벌 등 사실상 일제가 조선에 저지른 만행 대부분의 배후가 이토 히로부미라고 봐도 무방할 듯 합니다.
이토의 죄를 쉽게 말하자면 조선인들을 탄압하여 많이 죽였다. 또 조선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식민지로 만들어서 마음대로 뺏어갔다 - 정도로 안 의사는 옛날 시대로 치면 적장의 머리를 벤 것입니다. 다만 일본인들은 당연히 안 의사의 의거를 암살, 테러 정도로 취급합니다. (역사의 반성이라는게 없는 민족인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아래는 순국하기 며칠전의 사진입니다. 천주교 신부와 동생 정근, 공근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 때 동생들에게 유언을 전했습니다.
안 의사의 성장과정을 만화로 설명합니다. 어린이들도 이해하기 쉽겠네요.
안중근의사기념관에는 위의 사진들보다 훨씬 다양한 내용이 있습니다. 안 의사는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 초기에 돌아가셔서 해방때까지의 독립운동에 관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나 왜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합병되었는지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고 어떤 선택을 했었는지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만약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살아남아서 만주에서 계속 독립군으로 활동했다면 또 어떤 역사가 있었을까? 그런 생각들이 떠오를 때 이 기념관에 가기 좋은 날입니다. 관람료가 무료이고 내부 시설이 잘 되있는데 위치가 좀 도심에서도 접근하기 힘들어서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찾지는 않는 것 같더군요.
어른들에게도 추천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 아이들에게 더 추천할 수 있는 기념관입니다.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단순히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폭풍같은 흐름속에 일어난 중요한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찍어둔 대한국인 안중근 동상입니다. 이건 기념관 외부에 있습니다.
안 의사의 동상이 눈부신 태양빛을 받는 모습입니다. 그의 유언처럼 독립 소식을 듣고 천국에서 춤추고 만세를 부르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발자국 더 나아가 지금의 유례없이 번영한 한국의 모습에 더 기뻐하실 이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런 분들이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강한 것이겠지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못사는 나라는 이런 의인이 별로 없습니다. 의인이 적으니까 번영하기 힘든 것이겠지요. 누군가는 역사적 사태에 총대를 매야 됩니다. 누가 시켜서 한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헌신한 독립투사들이 많습니다만, 그 중에도 안 의사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기에 이 좋은 위치에 기념관을 개관한 것 같습니다. (좀 후미지지만 잘 보면 서울 도심의 노른자 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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